강진의 산꾼 차설광 - 하얀 산을 떠도는 아우를 위한 ‘망제가’
형 님! 하얀 산에 가야지요?” “그래, 우리 함께 가자.” 이미 저 세상으로 돌아간 자일파트너인 고 김영철씨가 묻는 말에 현재 전남연맹 남부지대 구조대원인 차설광씨(40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 후배와의 약속은 혼자만의 짐으로 남겨진 상태다.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듯 묵직하게 다문 입은 못다 이룬 꿈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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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설광씨가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22살, 포항에서 해군 하사관으로 근무하던 때다. 스킨 스쿠버장비를 사기 위해 들렀던 장비점에서 몇 번이나 허탕 치다, 벽면에 진열된 암벽장비에 매료되어 등반을 시작했다. 때마침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던 후배가 노조활동으로 인하여 입대, 같은 부대에 근무하게 됐다.
전문 산행을 해 온 후배와 자일파티를 이뤄, 내연산 관음암 등반을 시작으로 가지산 쌀바위, 부산 금정산의 부채바위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제대한 86년 이후에는 백두대간 위주의 워킹을 하던 중, 서울 김포공항에 취직하여 후배와 만나지만 격일 근무로 인하여 자일파티는 오히려 어려워지고 다시 귀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땅 끝에 들려온 소식은 암벽등반의 스승이었고, 하얀 산을 함께 꿈꾸던 불사조 같던 후배의 갑작스런 추락사였다. 후배의 죽음은 단지 자일파트너를 잃어버린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바로 하얀산 히말라야 자체였기에, 그의 죽음은 하얀 산에 대한 상실과 좌절이 되었다. 그러나 혼자가 된 그는 더욱 산에 매진한다. 하얀산에 가는 것만이 생전 후배와의 약속을 지키고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 지리산 한신 계곡에서 빙벽등반을 시작하였고, 92년에는 한국등산학교 동계반에 입교했다. 전라도 땅 끝 촌놈의 멍에를 벗어 던지듯 이를 악물고 남보다 한번 더 밟고 찍으며 수료한 등산학교는 산악활동의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93년에 금릉산악회를 창립하여 등반대장을 맡고 94년에는 북알프스를 종주했다. 96년에는 북알프스 등반을 함께한 김회율씨와 하얀 산 매킨리로 향했다. 빙하를 오르며 서로는 안자일렌을 한 상태에서 크레바스에 추락하는 상대를 번갈아 가며 생명을 구해주었지만, 산의 극한 상황은 이미 둘의 한계를 넘어섰다.
파트너가 등반을 포기했다. 차설광씨는 후배와 그토록 갈구했던 흰 산을 포기할 수 없어 서로를 묶었던 자일을 풀고 단독으로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하얀 설사면에서 홀로된 그 또한 화이트아웃을 경험하며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하얀 산은 끝내 정상을 내주지 않았다. “후배가 살아 있었다면 이미 히말라야에 같이 가지 않았을까?” 마지막 내뱉은 말은 후배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오르지 못한 하얀 산에 대한 절규로 다가왔다. 이제 다시 매킨리를 등반할 준비가 됐다는 그에게, 다른 꿈이라면 지역적인 어려운 여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등산학교를 세워 후배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글·강윤성 기자 사진·이훈태 기자>
<출처 : 사람과 산. 2001. 5월호>